“韓반발에 어렵다”…위안부 자료 등재 방해·군함도 ‘먹튀’도 부담
아베 등 자민당 보수·우익 “추천하라” 압박…선거 앞두고 고심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추천을 보류하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역사 왜곡을 조장한 보수·우익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추천을 강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어 일본 정부의 최종 선택이 주목된다.
만약 일본 정부가 추천을 강행하면 2015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재 때처럼 국제 무대에서 한일 양국의 역사 논쟁이 재연될 전망이다.
일본이 당시 했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은 심사에서 불리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 일본 언론 “사도광산 추천 보류 방향으로 조율 중”
일본 정부는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는 구상을 보류하는 방향으로 조율 중이라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복수의 일본 정부 관계자 설명을 근거로 20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사도 광산을 세계 유산으로 추천하더라도 한국의 반발 등으로 인해 내년에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록될 전망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다음 주쯤 방침을 정식으로 결정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심사에서 탈락시킨 후보가 나중에 세계유산에 등록된 사례는 없다.
일본 정부는 2024년 이후에 세계 유산 등재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라고 신문은 덧붙였다.
중일 전쟁 중 일본군이 벌인 만행인 난징(南京)대학살 관련 자료가 2015년 10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일본이 심사 제도 변경을 주도한 것이 이번에 일본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사 제도 변경은 2016년 한국 등 8개국가·지역 시민단체가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일본이 집요하게 요구한 끝에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 등재 때 반대 국가가 있으면 심사를 중단하고 대화를 하도록 작년에 제도를 개편했다.
이는 일본이 반대하면 위안부 관련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에 사실상 등재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였다.
사도 광산의 경우 세계기록유산이 아니라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기 때문에 부문이 다르기는 하지만 한국이 반대하는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자고 일본이 주장하면 ‘이중 잣대’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외무성 내부에서는 “이번에는 일본이 뒤바뀐 입장이 됐으며, 한국의 반발이 있는 가운데 (사도 광산을) 추천하면 국제사회의 신용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요미우리는 전했다.
민영방송사 네트워크인 JNN 역시 일본 정부가 사도 광산의 추천을 보류하는 방향으로 최종 조율 중이라고 전했다.
이 매체는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 작업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으며 장래 등재 실현을 위해 전략을 다시 짜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 선거 앞둔 일본…우익 정치인 “추천하라” 압박
일본 정부는 현 상황에서는 심사 통과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해 추천을 보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 5월 니가타 지사 선거, 여름 참의원 선거를 앞둔 가운데 집권 자민당에서는 한국의 반발 때문에 추천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강경론이 대두하고 있다.
민영방송 TBS 등에 따르면 극우 사관 추종자로 분류되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은 사도 광산이 “일본의 명예에 관한 문제”라며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진심으로 힘을 내면 좋겠다”고 전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자민당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보수단결의 모임’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추천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를 18일 채택하기도 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자민당 최대 파벌 회장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20일 열린 파벌 모임에서 “논전(論戰)을 피하는 형식으로 신청하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며 일본 정부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사도 광산을 어떻게 할지 아직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기하라 세이지(木原誠二) 관방부(副)장관은 20일 열린 정례 기자회견에서 사도 광산 문제에 관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말한 대로다. 정부로서는 등록을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라며 “이를 위해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가 하는 관점에서 현재 정부 전체가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세계유산 다섯번째 도전하는 사도…강제노역 제외 ‘꼼수’
일본 니가타(新潟)현의 사도섬에 있는 사도 광산은 에도(江戶) 시대(1603∼1868년)에 금광으로 유명했으나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한 후에는 구리·철·아연 등 전쟁 물자를 캐는 광산으로 주로 활용됐다.
일제는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사도 광산에 조선인을 대거 동원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발간 자료에 따르면 “최대 1천2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으나 실태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으며 히로세 데이조(廣瀨貞三) 일본 후쿠오카(福岡)대 명예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적어도 2천명 정도”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일본 측이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 노역의 역사를 제외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2010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추천 잠정 목록에 포함될 때만 해도 메이지 시대(明治·1868년∼1912년) 이후 시설이 대상에 포함됐으나 2019년부터 일본 문화청에 제출된 추천서에서는 대상 기간이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로 한정돼 일제 강점기가 제외됐다.
이는 작년 3월 일본 정부에 제출된 추천서 추가 자료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군함도 등 일본의 산업시설을 세계유산에 등재할 때 경험에 비춰보면 조선인 강제 동원 등을 반영하지 않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로 의심된다.
사도 광산은 2010년 11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기재됐다.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2015년부터 일본 문화청에 추천서를 제출했으나 국내 선발 절차에서 4차례나 탈락했다.
이들 지자체는 2022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2020년 3월 일본 정부에 다섯 번째 추천서를 제출했다.
2022년 등재를 목표로 하는 일본 내 다른 후보군이 없는 단독 신청이라서 사도 광산 추천이 유력한 것으로 관측됐고 일본 문화심의회는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에 추천할 일본 후보로 선정한다고 지난달 일본 정부에 통지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도 광산을 세계 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일본 문화청은 “정부 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며 이례적으로 여지를 남겼다.
당시 한국 외교부는 사도 광산이 후보로 꼽힌 것에 대해 “매우 개탄스러우며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논평한 바 있다.
◇일본 군함도 ‘먹튀’…사도 광산 추천해도 심사 난항 가능성
유네스코 추천서 마감은 다음달 1일이며 일본 정부는 조만간 최종 결정을 내릴 전망이다.
만약 일본 정부가 추천을 강행하면 심사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비슷한 논쟁은 2015년 군함도 등재 때 벌어졌는데 일본은 조선인 강제 노역을 비롯한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하고서 군함도 등을 세계유산에 등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세계유산 등록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군함도 등에 관해 안내하는 시설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설치했다.
하지만 군함도의 조선인이 차별받지 않고 지냈다거나 강제노역, 가혹행위 등이 없었다는 이미지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전시물이 구성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비롯한 일본의 후속 조치를 점검하고 작년 7월 31일 자로 내놓은 결정문에서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그들의 의지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기를 강요받았다는 것과 일본 정부의 징발 정책에 관해 이해하도록 하는 조치” 등 약속을 이행하라고 권고했다.
일본 정부의 이런 이력은 사도 광산에 대한 심사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