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홍정도는 왜 노무현의 심장을 겨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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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죽이기’ 프레임의 진짜 설계자는 누구였나

—스탠퍼드발(發) 취재, 데스크의 익명 지시, 그리고 한국 정치의 2009년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문장이 진부하게 들릴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이 언론의 ‘프레임’에 의해서 서서히 밀려날 때, 그 문장은 다시 칼날이 된다. 2009년 봄, 팰로 앨토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몇 편의 기사와 몇 줄의 캡션은 여론을 바꾸었고, 그여론은 다시 한 사람을 벼랑으로 몰았다. 이 르포는 그 봄의 동선을 복원한다. 누가, 무엇을, 왜 겨눴는지—그리고 그 이후무엇이 달라졌는지.

1. 보수언론 정체성 ‘이탈’과 ‘복귀’ 사이

노무현 정권 출범 직후 부터 중앙일보는 보수 선명성 시비에 시달렸다. 노무현 정부 초기 중앙일보는 전통적 보수 3대 일간(이른바‘조중동’)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정부와 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노무현 정권과 보조를 맞추면서 친진보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런 중앙일보의 변화에 보수 독자들은 의아해했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삼성그룹 홍라희 여사의 남동생으로 친기업, 친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우파 중도 매체인데, 노무현 정권 들어서 논조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아예진보 정권의 박해를 각오하고 참여 정부와의 전쟁을 벌이는 데 반해 중앙일보는 친정부 성향의 보도 기조를 이어갔다.

그중 가장 정점은 2004년 2월이었다. 취임 1주년을 맞은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상춘재 대담—보수매체 오너와 현직 대통령의 3시간이 넘는 이례적 장시간 인터뷰였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변절”이란 말까지 나왔다.

2004년 2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 특별대담을 가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듬해 2005년 2월, 홍석현은 주미대사로 공식 임명됐다. 참여정부와 중앙일보 사이의 ‘가깝고도 불편한 거리’는 이때 한층가까워졌다. 이런 노무현 정부와 홍석현 중앙일보의 밀착은 기존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정원의 내부고발과 경쟁 언론사의 ‘합작’이었을까? 그해 여름, ‘삼성 X파일’ 파문이 터지며 홍석현은 불과 5개월 만에 대사직에서 중도하차했다. “실용외교 적임자”에서 “최단명 대사”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계절 하나였다.

이 삼성 X파일은 노무현 정부 기간 중 삼성 및 중앙일보와의 관계에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1997년 안기부(국정원) 도청 조직인 ‘미림팀’이 녹음한 녹취록(이른바 ‘삼성 X파일’)이 공개되면서, 삼성그룹이 홍석현 당시중앙일보 사장을 통해 정치자금 제공을 논의하고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뇌물(떡값)을 제공했다는 내용이 폭로된 것이다. 이 사건은 지금도 홍씨 일가가 손으로 덮어버리고 싶은 치부 같은 사건 중의 하나이다.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 97년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을 정치권에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2005년 11월 12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당시 검찰은 불법 도청으로 수집된 자료라는 이유와 공소시효 만료 등을 들어 이건희 회장 등 삼성 관계자들을 불기소처분 했다. 오히려 녹취록 내용을 공개한 언론인(MBC 이상호 기자)과 국회의원(노회찬 의원)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으면서, 당시 정권이 삼성에 대한 ‘봐주기’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삼성공화국 논란)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노무현 정권과 긴밀한 협력은 중앙일보의 새로운 리스크로 부상했다. 정권이 바뀌자 친노 정권의 주미대사를 역임했던 홍석현 회장에 대한 견제가 공공연하게 언급될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의 검찰은 노무현 수사에 칼끝이 모아졌고, 다음은 중앙일보의 차례였다는 것이 그 당시 찌라시의 주요 톱기사였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홍석현 회장이 중앙일보 경영 전면에 나선다면 이명박 정부의 보복과 견제는 더 심해질 터였다. 자연스럽게 장남 홍정도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보수 정권 교체로 인해, 스탠퍼드에서 MBA를 2008년 마친 홍정도의 복귀 시점은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홍정도는 MBA 학위 취득 이후인 2009년에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이사 겸 중앙미디어네트워크 방송본부기획조정담당을 맡으며 경영진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 이는 유학 후 그룹 내에서 공식적으로 새로운 직책이자 첫임원으로 복귀한 것이다.

홍정도의 중앙일보에겐 뭔가 강력한 신호탄이 필요했다. 이명박 정권에게 어필할 수 있을 만한, ‘중앙일보가 180도 바뀌었어’, ‘다시 보수로 돌아왔어’라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첫 임원을 맡은 홍정도에게는 이 역할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앞으로 빠른 후계구도를 정립하고 조직을 장악하는 리더십을 보일 수 있는 기회이자 적기였다.

다행히 홍정도에게 유리한 정치적 격랑기가 도래했다. 2008년 12월 정권 교체가 시작되자 검찰이 박연차 회장을 구속하면서 단순 기업 비리 사건이 아닌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검찰은 이 사건을 ‘권력형 비리’로 규정하고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에 배당했다. 2008년 7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탈세 혐의)와 검찰의 세종증권 헐값 인수 의혹 내사에서 시작된 사건이 노무현 죽이기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같은 해 12월,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가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2009년 3월~4월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던 이광재 전 의원,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등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잇따라 소환 및 구속되었다. 특히 정상문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 일가의 금품 수수 의혹에 연루되면서 사건의 핵심 고리로떠올랐다.

이 시기에 권양숙 여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금품을 수수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7일공식 홈페이지에 대국민 사과문을 올리고 가족의 잘못을 인정했다. 홍정도에게 이명박 정권에게 중앙일보의 변신을 알리는기회로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홍정도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시절 노건호를 떠올렸다. 덥수룩한 머리 스타일에 숫기가 없던 노건호는 전형적인 경상도남자 스타일이었지만 살아있는 대통령 권력자의 아들로 팰로 앨토에서 대접을 받았다. 두산, LG 동문들이 모일 때마다 대기업 자제라는 계급장을 떼고 노씨 주변을 돌며 살갑게 굴었다. 홍정도는 공식 모임에서 몇 번 자리를 같이하며 얼굴을 알았지만, 노건호와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노건호를 감싸고 도는 동문들의 굽신거리는 처신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뿐 홍정도의 인생에 노건호의 존재는 전혀 없었다. 스탠퍼드가 있던 팰로앨토는 홍정도에게 손바닥으로 볼 수 있는 ‘안방같은’ 소도시였다. 

홍정도는 밤늦게까지 중앙일보 사옥에 머물렀다.

2. 팔로앨토행() “지금 당장  끊어

다음날 중앙일보에 출근한 이진주 기자는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았다. 취재 사유도 모른 채 당장 팰로앨토로 출발하라는 지시였다. 취재처도, 취재 대상도 모르는 채 말이었다.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던 이진주 기자는 말 그대로 3년 차 기자의 서슬 퍼런 여기자였다. 뛰어난 분석력과 치열한 특종정신은 눈에 띄었다. 수습 기간 며칠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긴 생머리를 끈으로 질끈 묶고 경찰서에 머물며 사건 실마리를 쫓던 강인한 기자 근성이 있었다.

팰로앨토에 도착한 이진주 기자(사진)에게 한 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노건호씨를 취재하라’.

이 기자는 ‘노 대통령 일가를 정조준하는구나’ 이런 직감이 들었다. 팰로앨토를 샅샅이 뒤져 노건호의행적을 취재하기엔 이 기자만큼 임무에 적합한 기자는 없었다. 시경 수습 기자 시절처럼 경찰서 곳곳을 다니듯 운동화를 신고 팰로앨토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 기자는 스탠퍼드 MBA 동문들부터 접근했다. 며칠 만에 서른 명의 사람들을 취재했다. 그들은 한국 언론의 보도를 알고있었듯 노건호 씨의 집, 회사, 자동차, 투자, 여행, 골프 등 모든 사소한 것들을 탈탈 털어 말해주었다. 언제 어느 비행기를타고 누구와 어디를 다녀왔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모두 다 말씀드릴게요. 제 이름은 빼주세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이 기자는 노건호 동문과 지인을 사칭하던 주변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고, 허망한 슬픔이 가득 찼다. 빼돌린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대통령 아들의 자화상이 나와야 했는데, 그가 취재한 노건호의행적은 평범한 한인 유학생의 일상생활의 모습이었다. 나름 열심히 취재했지만 데스크에게 무미건조한 기사를 송고하고 나니계속 꼬치꼬치 질문이 들어왔다.

2009년 4월 10일. 기사를 보던 이 기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노건호, 미국 유학 중 월세 3600달러 고급 주택에 살았다”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되어 있었다. 

기사 내용은더 가관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36) 씨가 미국 유학 중이던 지난해 봄 실리콘밸리의 고급 주택으로 이사했던 것으로 9일 확인됐다. 노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 집에 대해 “렌트했던 것으로 월세는 3600달러(당시 환율로 360만 원, 현재 환율로는480만 원)였다”고 밝혔다. 노씨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 2년 차이던 지난해 4월께 학교 기숙사에서 이 집으로 이사했다. 노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둘째 아이가 태어나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MBA 과정도 끝나가기 때문에 집을 옮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웃들에 따르면 노씨는 한두 달 전까지 이 집에 거주했다. 그는 현재 회사(LG전자 미국 법인)가 있는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다. 그가 살았던 집은 스탠퍼드대에서 승용차로 10∼15분 거리에 있는 마운틴뷰 지역의 고급 주택 단지에 있는 2층 집이다. 1, 2층을 합한 내부 면적은 약 250㎡, 정원 면적은 약 300㎡다. 방은 세 개이며, 화장실도 세 개다. 현재 집은 비어 있는상태다. 부동산 중개업소에 따르면 집값은 약 110만 달러(약 15억 원). 

노씨는 “중개업소를 거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직접 집을 구했다. 비교적 월세가 싼 집이었다”고 말했다. 이 집의 소유주는한국인 이모 씨와 안모 씨로 등록돼 있었다. 

현재 한국의 한 인터넷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씨는 노씨에게 세를 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집은 내 집이 맞다. 하지만 노건호 씨가 누군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노씨는 이 집에 살 때 두 대의 차가 있었다. 한 대는 폴크스바겐 투아렉이었고, 나머지는 현대 그랜저TG였다. 투아렉은 한국에서 고급 사양인 경우 가격이 1억 원이 넘는다. 

스탠퍼드대 유학생들 중 일부는 노씨가 다른 학생들과 골프 치러 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동반자는 주로 공학 분야를 전공하는 유학생들이었다. 한 학생은 “학교 내 골프장은 1인당 그린피가 25달러 정도 하는데 노씨는 120달러가 넘는골프장도 다녔다”고 말했다. 

노씨는 LG전자에 휴직계를 내고 유학했다. 회사에서 받는 돈은 없었다. 그는 유학 경비에 대해 “한국에서 집 전세비 등을빼서 약 2억 원을 미국으로 가지고 와 썼는데, 돈은 좀 남았다”고 말했다. 

스탠퍼드대 MBA 과정은 1년 수업료가 약 5만 달러(현재 환율로 6700여만 원)다. 수업에 필요한 활동비와 생활비를포함하면 1년에 최소 8만 달러(1억 700여만 원)는 든다는 게 학생들의 설명이다.

팰로앨토(캘리포니아)=이진주 기자

3. ‘3,600달러 마술지역 맥락이 사라질 

이진주 기자가 쓴 당시 실리콘밸리(산호세-서니베일-산타클라라 HUD FMR)의 2009년 3베드룸 기준 공정임대료(FMR)는 약 2,113달러였다. 단독주택·우수 학군·대학 인접 프리미엄이 붙는 팰로앨토/마운틴뷰권에서 3,600달러는‘비싸지만 있을 법한’ 중상위 시장가였고 실제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평범한 렌트비 수준이었다. 곧장 ‘초호화’로 단정할 수만은 없는 수치였다. 그러나 데스크가 개입한 지면의 프레이밍은 지역맥락을 걷어내고 숫자만을 증폭했다.

‘월세 3,600달러’, 억대 외제차 2대, 수십만원 호화골프장 이용—한국 독자의 감각으로는 곧장 ‘특혜’ ‘비자금’ ‘사치’로 연결되기 쉬운 수치다. 프레임은 단순했고 강력했다. 숫자·차종·골프장—세 개의 키워드만으로도 노무현 대통령이 갖고 있던‘청렴’과 ‘서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충분했다.

이진주 기자가 보낸 기사 초안의 톤과 내용은 바뀌었고, 흔히 ‘양념을 친다’는 표현이 쓰이는 ‘악마의 편집’이 들어가 있었다. 이진주 기자가 기사를 첫 송고한 이후 무려 7시간이 넘게 걸려 최종 수정 기사로 출고되었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회사지원도 아닌 회사원 노씨가 2억 원을 갖고 와 미국 고급 주택에서 월세 3600달러와 1억 원이 넘는 외제 차량을 굴리고, 그린피가 120불 넘는 호화 골프장을 다닌다는 기사로 읽게 되는 것이다.

이 기사의 파급력은 컸다. 한국의 모든 방송과 포털엔 이진주 기자의 기사가 도배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을 옹호하던 여론은급격히 나빠졌다. 중앙일보는 실리콘밸리에 이어 샌디에이고에까지 기자를 급파했고 나중에 박연차의 베트남 공장까지 취재하며 노무현과 박연차의 커넥션을 파헤치는 동력으로 썼다. 이 당시 본 기자도 미주 중앙일보 편집국에 근무했었다. 당시 파견나온 김준술 기자, 이진주 기자를 미주 중앙일보 사회부에서 신모 기자, 서모 기자를 지원했고, 사진부 김모 기자도 취재 지원을 했었다.

검찰 수뇌부를 장악한 이명박 정부에는 중앙일보의 변신, 그리고 새로운 경영진으로 합류한 홍정도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서가 국정원을 통해 보고되었다. 중앙그룹을 물려받을 홍정도가 예상한 만족스러운 흐름이었다.

4. 검찰그리고 ‘논두렁 시계 대중정치학

중앙일보가 쏘아 올린 ‘노건호 특종’과 단독 보도를 놓친 다른 언론사들도 뒤늦게 검찰의 보도를 여과 없이 써대기 시작했다. 

4월 22일, KBS는 ‘전직 대통령 시계 수수 의혹’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빨대(정보 유출) 색출’ 언급이나왔지만, 여론의 물줄기는 이미 방향을 정한 뒤였다. ‘박연차 게이트’라는 사건명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논두렁 시계’라는선정적 기표로 대체됐다.

나빠진 여론을 틈타 한국 검찰은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전직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였으며, 정치적 충격과 함께 친노 세력 및 지지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검찰 수사에 대한 ‘정치 보복’ 논란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추가 소환 및 구속영장 청구 가능성이 계속 거론되면서 정국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였다. 전직대통령에 대한 수사 강공과 피의사실 공표 논란, ‘정치 보복’ 공방이 겹치며 정국은 파열음을 냈다.

수사 과정에서 ‘논두렁 시계’ 등 피의 사실(혐의 내용)이 언론에 자세히 유출되면서, 노 전 대통령과 가족에 대한 여론의비난이 거세졌다. 이는 노 전 대통령에게 큰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 시대의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 마을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생을 마감했다. 그의 비극적 선택 직전, 언론은 검찰의 수사 내용을 받아쓰며 쉴 새 없이 ‘독화살’을 쏘아댔다. 돌이켜 보면 그화살촉 중 가장 날카로웠던 것이 바로 중앙일보의 ‘노건호 미국 유학 호화 생활’ 보도였다. 가족의 안위와 민주·진보 세력의국민적 염원을 저버릴 수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은 끝내 극단적 선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주 기자는 데스크 윗선의 지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기사로 인해 야기된 충격적 비극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숭배하는 꼴보수 아버지가, 어느 날 미국까지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거, 그만 해라. 시골에서 밀짚모자쓰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 보기 좋더라. 이제 그만 해라.” “아버지, 알아요. 근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제가 막을 수 없는일이에요.” 전화기를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저의 데스크들도 모두 알았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사는 그렇게 나갔습니다. 제가 쓴 것들과 제가 쓰지 않은 것들로 세상의 모든 비난을 들었습니다. 목숨까지 위협받을 때, 친구들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진주야, 제발 네가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해.” “내가 댓글을 달까? 너 그런 사람 아니라고 내가 댓글을 달까?” 그때 저는말했습니다. “아냐, 내 이름이니까, 내가 함부로 내 이름을 빌려주었으니까, 대가를 치를게. 괜찮아. 너까지 다치지 말고, 그냥내가 다 받을게.” 그때도 우리 선배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사람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진주 기자는 입사 3년 차의 열혈 기자로 자신이 그렇게 충성하는 중앙일보라는 조직의 키를 잡은 홍정도 선장이 어느 방향으로 배를 몰았는지 몰랐다. 노무현 시절 주미대사로 충성 서약을 했던 아버지 홍석현 회장의 진보 색깔을 지우고 보수정론지로 이명박 정권시기를 살아내야 하는 사냥꾼이 쏜 ‘화살촉’ 역할을 했다는 것까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기사 파급력으로인해 가혹한 성찰로 내몰렸지만, 실제 ‘악마의 편집’을 거쳐 탄생한 그의 기사의 목적성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에 대한 이해는없었다.

“알면서도 나갔다”는 이 기자의 고백은, 이 프레임이 취재 현장의 진실이 아니라 데스크의 ‘익명 지시’와 ‘정치적 의도’에 의해 최종 결정되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갑작스러운 미국 북가주 팰로앨토로 가라는 데스크의 지시에는 누군가 이 지역을 잘 아는 사내 고위층의 지시가 없이는 전직 대통령을 겨눈 취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이 왜곡된 프레임은 노 전 대통령을 향한 검찰 수사와 결합하여 여론의 맹공을 유도하는 ‘방아쇠’ 역할을 수행했다.

이진주 기자는 평생 진보 정치인의 우상 노무현의 죽음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는 죄의 멍에를 쓰고 살아야 했고, 자책과모멸감, 죄의식으로 어렵게 가진 아이를 유산하는 개인적 희생까지 치러야 했다.

“그 말들이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지향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을 적은, 익명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들은 무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몇 번은 침묵했지만 저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저도 유산을 하였다고. 그 계정으로 다시는 메일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하혈이라고만 밝혀왔지만, 그때 저는 아마도 아이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 달 내내 하혈을 하면서 아이가 사라진 것을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제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참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퇴사를 고하고 한 달 동안 집에 누워있는데, 제가 죽어버릴까 봐 데스크가 선배를 저희 집으로 출근시켰던 겁니다. 그 선배가 요즘 그럽니다. “진주씨, 십 년 전이랑 똑같구나. 내가 죽 사주고 싶다.” 

저는 온 국민의 우상을 제 손으로 무너뜨렸고, 매일, 매 순간, 그의 죽음을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제손에 묻은 피를 다 닦아내지 못할 것을 압니다. 몇 번 이 일을 고백한 바 있지만, 평생 동안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죄하고참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서른 살의 죄가 마흔 살의 죄로 다시 돌아온 지금, 그 죄를 부인할 마음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역사의 죄인이며, 그 트라우마를 안고 어떤 방법으로든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이진주 기자는 죄송할 필요가 없다. 이 기자는 책임이 없다. 3년 차 기자로 소총 부대처럼 전선에 가서 상부 명령에 따라열심히 총질한 역할 밖에 없다. 그 병사를 배치하고, 의도적 총질을 기획한, 개인 기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중앙일보의 ‘정치적 변신’을 획책하며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런 노무현에 대한 비극적 총질 뒤에 홍정도의 중앙일보는 2010년 12월 31일 이명박 정부의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JTBC 인가를 받았다. 

중앙그룹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하는 홍정도 그룹 부회장.

살펴보라. 그 뒤 홍정도의 중앙그룹 후계 작업이 얼마나 가속화되고 순조로웠는지? 홍정도의 직함은‘부사장—사장—부회장’으로 상승 곡선을 탔다. 반면, 팰로 알토에서 스탠퍼드 MBA을 같이 다녔던 동문 노건호는 중앙일보의 노씨의 호화생활 보도후 LG전자 미국 법인 근무라는 ‘평범한 직장인’의 경로에서 아버지의 서거 이후 폐족의 아들로 낙인찍인 채 숨죽이며 살아가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건호씨.

(2편에서 계속)

최상태 기자
전 미주 중앙일보 기자

steven@sundaynewsusa.com

[시리즈 예고]
(2) 홍정도는 왜 노무현의 심장을 겨눴나? (2)  
(3) 흔들리는 중앙그룹 — 경영난 속 자산 잇단 매각..홍정도 자택도 매각 
(4) 미주 중앙일보 부동산 매각자금 2,000만 달러 어디로?  
(5) 미주 지사장 2인의 극단 선택, 그리고 ‘최장수 금고지기’ 실체
(6) 중앙일보는 치외법권인가? 불법과 탈법, 그리고 집단소송.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개혁의딸과 함께 노무현 서거 비하인드 히스토리 시리즈와 관련, 유튜브로 제작해 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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